서학논쟁
- 최초 등록일
- 2001.12.10
- 최종 저작일
- 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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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학의 전래
2.천주교에 대한 찬반 양론
3.우주관의 변화
4.인간관의 변화
5.자연관의 변화
6.서학 논쟁의 의의
본문내용
중국을 통한 서양문화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는데, 최초의 것은 세계지도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1631년(인조 9)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이 천리경(千里鏡)·서포(西砲)·자명종(自鳴鐘)·염초화(焰硝花)·만국지도(萬國地圖)·천문서(天文書)·서양풍속기(記)·천주교서적 등을 가져왔다. 1645년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아담 샬에게서 천문·산학(算學)·서양종교에 관한 책들을 많이 가져 왔고, 지구의(地球儀)·천주상(天主像)도 가져 왔다. 한편 박연(朴淵) 및 하멜 등 서양인이 표류, 조선에 이르게 되어 서양식 대포의 제조 등 새로운 서양 과학을 배우게 되었다. 서양문물이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 알려져 그들의 학문적 탐구심의 대상이 되었고, 1654년(효종 5) 조정에서 개량력(改良曆)인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물과의 접촉으로 영국·프랑스 등의 문명국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들의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천문학을 비롯한 서양학술의 성과에 대하여 놀라, 당시의 지식인들은 실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관찰의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