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사] 조선후기 시대 상황과 호락논쟁의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1.12.03
- 최종 저작일
- 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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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호락논쟁의 발발과 배경
3. 호락논쟁의 전개과정
4.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호락논쟁의 의의
5. 결론
본문내용
조선 후기 사회에서 중요한 사상적 논쟁이었던 호락논쟁의 배경, 발발원인,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시대적 상황, 사상사적 의의, 성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를 정리해보면 호론은 율곡의 학풍을 더욱 심화하여,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기질의 차이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당시 청의 존재를 여전히 오랑캐로 한정하고 윤리와 도덕적 의식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명분론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퇴계 이후 형성된 남인 중 기호남인 계열의 명분론적 입장과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즉 가장 율곡적인 호론과 가장 퇴계적인 기호남인 계열이 다같이 명분론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인데, 이는 퇴계와 율곡 이전에 주자학의 본질이 이러한 화이론적 명분론과 윤리와 도덕 의식의 강조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낙론은 율곡의 학풍을 퇴계학과의 절충을 통해,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은 다르지 않으며, 다만 기질의 차이가 성인과 범인을 판별하기에 범인은 기질의 개선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음을 밝혀, 양 호란 이후 청을 중화로서 인정하고, 청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 속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탄력적인 대처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인성과 물성이 다르지 않음 속에서 윤리와 물리가 다르지 않다고 하여, 객관적, 상대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여, 이른바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사상과 연계되었다.
한편 호락논쟁은 정국의 당시 주도계층이던 노론 내부에서만 발생하였다. 이러한 호락논쟁에 대해 남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논쟁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인물성론이 이야기되었고, 이는 다산 정약용에 이르었다. 퇴계 이후 남인, 특히 성호학파와 정약용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들의 경세치용적인 학문의 추구는 노론과 낙론을 계승하는 북학파와는 다른 또 다른 실학의 계통을 형성하게 된다.
호락논쟁은 단순히 성리학 내에서의 이론 논쟁으로만 한정시켜 볼 수는 없다. 정묘, 병자 양 호란 이후 조선 사회가 입은 충격과 급변하는 세계질서의 변화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자연스런 사상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한국유학사, 이명수, 아세아문화사
한국유학사상론, 윤사순, 열음사
조선유학의 자연철학, 한국사상연구회, 예문서원
조선유학의 학파들, 한국사상연구회, 예문서원
한국철학사상사, 한국철학사연구회, 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