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 왕안석, 강유위의 개혁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1.05.14
- 최종 저작일
- 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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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왕망의 개혁
왕안석의 신법
강유위와 대동사상(대동세계)
본문내용
왕망은 중국 전한(前漢) 말의 정치가이자 전한과 후한의 구분이 되는 '신(新)'왕조(8∼24)의 건국자이다. 왕망은 복고적 색채를 띤 여러 가지 번잡한 정책을 폈다. 주(周)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사대제도를 두기도 하였다.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교전인 《주례(周禮)》에서 볼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여 사회혼란을 증대시켰다.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하였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18년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22년에는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난양[南陽]의 호족 유수(劉秀:後漢의 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河南省 葉縣)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후한이 그 뒤를 이었다.
결국 왕망(王莽) 개혁정치의 실패는 현실성이 결여된 이상(理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며 경제 그리고 문화(文化) 등등을 막론하고 인간 활동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이상(理想)을 견지하는 것은 전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理想)의 단 1%라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