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원정
- 최초 등록일
- 2011.06.07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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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序論
Ⅱ.영락제(永樂帝)와 환관(宦官)
Ⅲ. 조공무역(朝貢貿易)과 해금정책(海禁政策)
Ⅳ. 명(明)의 외교사절이 된 환관(宦官)
Ⅴ.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Ⅵ. 신대륙발견과 르네상스
Ⅶ. 結論
본문내용
鄭和의 遠征에 대한 考察
Ⅰ.序論
1405년 중국의 한족 왕조였던 명(明)의 장강 하류 유가항(劉家航) 정화의 원정이후 퇴적물이 지속적으로 퇴적되어 결국 수심이 얕아져 항구로서 기능을 잃게 되어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에서 60여척의 정크 함선에 몸을 실을 2만5천여명의 승무원이 그동안 인류 역사상 없었던 사상 초유의 해상원정이 시작되었다. 이 원정을 지휘하였던 사람은 전통적인 중국의 민족인 한족(漢族)도 세계를 호령했던 유목민족인 몽고족(蒙古族)도 아니었다. 마화(馬和)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눈동자에 색이 있다 하여 색목인(色目人)으로 불렸으며 후손을 남길 수 없는 환관이었다. 또한 당시 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의 둘도 없는 심복이었다. 이 사람은 후에 황제에게 정씨 성을 하사 받아 정화(鄭和)라고 불리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유럽인들보다 약 반세기 앞서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닌 명(明)나라 제독 정화다.
1405년 시작된 정화의 해외 원정은 그 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입증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정화의 원정에 대한 평가는 영락제(永樂帝)의 조공관계 확립과 건문제(建文帝)를 수색하기 위해 파견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화의 원정이 최근 중국을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들의 적극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특히 게빈 멘지스라는 학자에 의해 새로운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총 7차례의 대규모원정의 규모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기억되는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을 이미 정화가 했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속속들이 출몰하고 있고 여러가지 설들이 주장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재까지 콜럼버스가 누리고 있는 아메리카대륙의 최초 발견의 영광은 정화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화의 이런 대규모 원정이 유럽의 르네상스에 무시하지 못할 사회적 영향을 주었다고 게빈 멘지스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정화는 어디까지 항해 했으며 명나라의 해금정책(海禁政策)과 함께 불타버린 대원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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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빈 멘지스 저 조행복 역 『1421』 사계절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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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다 다카노부 저 서인범, 송정수 역 『중국의 역사』 혜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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