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의 중심사상과 도교사상이 민족사에 미친 영향
- 최초 등록일
- 2009.04.07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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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표지를 포함해 7장입니다.
목차
서 론
1. 한국도교의 형성과 전개
2. 도교사상의 내용
3. 한국도교사상이 민족사에 미친 영향
결 론
본문내용
도교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 구별된다. 도가 사상은 산동성 지방에서 전해졌다고 하며, 본래 동이족의 재래신앙이었는데 중국화되어 민중에게 내재화되면서 도교가 되었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장도릉(張道陵) 장도릉(張道陵, ?~?) : 본명은 릉(陵),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이 세웠다고 전하며, 그는 오두미가를 창시했으며, 그가 죽은 후 손자 장노(張魯)에 이르러 사천의 파촉지방에서 교세를 떨치켜 오두미교(五斗米敎)로 성장하였다.
이후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 ·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 위백양(?~?) : 호는 운아자(雲牙子). 중국 후한 때의 철학자로 《주역》에 나오는 원리를 빌려와 신단(神丹)을 만드는 방법과 과정을 논하였다.
과 갈홍(葛洪) 갈홍(284~363) : 동진 사람으로 신선이 되는 방법을 설명한 선가서(仙家書)인 포박자를 저술함.
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寇謙之)가 전래 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구겸지는 북위(北魏, 386~534)의 태무제를 알현하고 그에게 이론을 설파한 이후, 태무제는 도교를 국교화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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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1997년02월20일 제 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