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 최초 등록일
- 2009.04.07
- 최종 저작일
- 2008.03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아편전쟁
목차
없음
본문내용
그동안 아편전쟁은 영국이 중국을 침략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전쟁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 비디오 시청으로 아편전쟁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임칙서라는 인물이 기억에 남았다.
아편전쟁은 19세기 서구 열강인 영국이 중국에서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과 벌인 2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19세기에 들어 영국 상품의 판매시장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영국에게 가장 큰 장애는 광둥무역체제였다. 광둥 무역체제하에서는 대외무역이 광저우 한 항구에 국한되었고, 청나라의 허가를 얻은 공행이라는 독점적 상인 길드를 통해서만 무역이 가능했다. 영국은 공행의 자의적인 관세 부과와 외국 상인의 무역에 대한 제한 및 무역한의 제한을 무역신장의 장애로 여겼다. 따라서 아편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사신들을 파견하여 광둥 무역체제를 타파하고 무역을 확대하고자 했으나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 면화였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대체로 중국의 수출초과였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이 부족했다. 이에 영국은 은의 지불 없이 차를 수입할 방안을 모색했고 그에 따른 대체 수출품이 곧 아편이었다. 즉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지방 무역 상인이 중국에 밀수출하여 벌어들인 은으로 중국의 차를 수입한 것이었다. 1820년대 후반부터는 아편수입으로 인해 중국이 은의 유입국에서 유출국으로 바뀌었다.
중국 내 아편의 확산은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빈민층의 아편 흡식은 농촌경제의 파탄과 구매력 상실을 가져왔고, 관료와 병사의 아편 흡식은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또 은의 유출이 커짐에 따라 은값이 오르게 되자, 은으로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이 커져 조세미납사태가 일어남으로써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렇게 아편중독의 만연과 은의 유출로 인해 청나라가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으며, 황제는 아편 흡식을 아예 금지하자는 엄금론의 주장자인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