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내륙방어체제
- 최초 등록일
- 2009.03.30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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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 당시의 군제를 살펴보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게 된 이유를 알고, 임란 이후 변화를 가지는 군제의 모습을 살펴본다
목차
1. 들어가며
2. 조선초기의 군제
3. 임란 후 군제의 변화
4.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임진왜란은 1592년(宣祖25)부터 1598년(宣祖31)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올해로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16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조선은 7년만에 일본을 물리쳤으며 노량대첩을 끝으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임진왜란 의 시작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에 별다른 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이토록 무력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당시의 군제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조선 초기의 군제
조선전기의 군사제도는 중앙의 오위제(五衛制), 지방의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군사제도는 신분제와 병농일치제를 기반으로 하는 군역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즉 조선전기의 군역제는 양천제(良賤制)에 따라 양인만이 군역부담자로 간주되었고 노비에게는 군역이 부과되지 않았다. 한편 양인 내에서도 국가가 요구하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시취(試取)에 응하여 군역을 수행하는 갑사와 국가의 강제적인 징발에 따라 의무적으로 군역을 져야하는 정병ㆍ수군과 같은 존재가 있었다. 갑사나 정병은 각 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정한 기간 동안 번상(番上) 또는 유방(留防)하면서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신분제ㆍ병농일치제에 따른 군역제는 16세기로 넘어오면서 심각한 동요를 겪게 된다.
조선전기 중앙군제인 오위에는 다양한 병종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며 군액의 대부분을 차지한 병종은 갑사와 정병이었다. 한편 지방군제는 진관체제 하에 정병으로 구성된 유방군(留防軍)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진관체제는 오늘날과 같이 일정 연령의 장정이 소집되어 일정기간에 특정지역에서 복무를 하는 국가상비군 체제는 아니었다. 물론 국가의 중요시설이나 국방상 중요한 지역,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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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선수 2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1일(경술) 3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