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와 시사점에 대한 탐구
- 최초 등록일
- 2009.03.25
- 최종 저작일
-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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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 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 신라 삼국통일이 주는 시사점과 교훈성에 대해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신라의 고구려, 백제 정복은 민족통일로써는 불완전 하지만 한국사의 중세인 고려, 한국사의 근세, 근대 조선을 거치는 동안 삼국통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고려와 조선의 주민, 영토, 문화는 대부분 신라시대에 형성된 것이 주류라는 말이다. 본고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신라의 통일을 알아보기 전에 신라가 통일되기 까지의 일단의 과정을 알아보자.
고구려가 중국 당나라와의 오랜 싸움으로 국력을 소모시킨 것은 신라의 팽창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고구려가 당과의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7세기 중엽에 신라에서는 왕족이던 김춘추, 김유신등 가야출신 신귀족들과 결탁하여 상대등 으로 대표되는 구귀족을 제거하고 진덕여왕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한 것이 647년의 일이다.
신라는 이와 같이 지배층의 교체와 아울러 지방관을 감찰하는 외사정을 지방에 파견하고 원주에 북원소경을 설치하고 감해에 금관소경을 설치하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서 국력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밖으로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당나라와 친선관계를 강화하면서 적극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라와 당이 군사 동맹을 맺고 백제를 먼저 정복한 후에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는 전략이 세워졌었다. 그리하여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의 저항을 충청도 연산지방에서 물리치고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함락시킨 것이 660년의 일이었다.
벡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예정대로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고구려는 거듭되는 수, 당의 전쟁에 의한 국력소모가 아주 심했고 특히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에 의해서 민심이 일탈되고 이반되고 있었다. 더욱이 연재소문이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인 연점토와 그의 세 아들인 남생, 남천, 남산 사이에 벌어진 권력 쟁탈전은 고구려의 운명을 재촉하였다.
이 때를 틈타서 이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함락하자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였다. 이같이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서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특히 당나라는 대동강이북의 땅을 차지하기로 신라와 사전에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깨트리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한 야욕에서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면서 심지어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서 백제의 유민을 무마하고 신라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