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고조선사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9.03.17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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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의 고조선사 연구에 관한 소논문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북한의 시대별 고조선사 연구동향
1)초창기(1945~1956)의 고조선사
2)요녕성 중심설과 노예제사회설의 정립(1957~1966)
3)주체사상화와 학문의 침체(1967 ~1992)
4)‘단군릉’발굴
3. 현재 북한의 고조선사
1)고조선
2)후조선과 기자조선
3)만(위만)조선의 성립과 멸망
4. 북한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한 의문
1)단군의 실존여부와 단군릉
2)북한학계가 제시하는 사료의 사실성
본문내용
4.‘단군릉’발굴
1993년 10월, 북한의 고조선사 연구에 획기적인 사건이 생겼는데 바로 ‘ 단군릉’의 발견이다.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있던 한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을 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5000여년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조선시대 이래로 이 무덤이 단군의 묘라고 한 전승이 있어왔다는 점을 들어 이 무덤이 곧 단군릉이고 발굴된 두 구의 시신은 단군과 그의 부인이라는 주장이다. 북한학계는 이 발굴을 계기로 단군의 실재를 인정하고 5천여 년 전 평양 일대에서 고조선이라는 고대국가가 성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조선의 중심지 역시 기존의 요녕성설을 뒤집어 평양이 중심지였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평양을 세계 인류의 기원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단군릉 위치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문헌기록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강동현에 2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둘레가 410자이고 민간에서 단군묘로 전한다고 씌여 있다.
둘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1697년 7월 14일에 숙종왕이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해마다 수리할 것을 상주한 이인엽(李寅燁)의 제의를 승인하고 씌여있다. 또한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1786년 8월 9일에 정조 왕이 평양감사에게 단군묘를 순시한 다음 부근의 백성들로 묘지기를 정하고 강동원은 봄과 가을에 직접 묘를 돌아보는 것을 제도화하도록 지시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영조실록(英祖實錄)>에도 1739년 5월 23일과 1763년 4월 22일에 영조왕이 두 차례에 걸쳐 평양감사에게 단군릉을 수리하고 제사지내도록 지시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근거로 조선정부가 강동의 단군무덤을 중시하고 국가적인 관심 속에서 보존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이들 기록을 보면 단군은 실재한 인물이고 고조선의 건국시조이며 우리 선조들이 오랜 옛날부터 강동에 있는 단군릉을 실재했던 단군의 무덤으로 간주하고 제사지내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 무덤양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고구려시기에 그 무덤을 개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들의 시조인 동명왕과 함께 단군도 숭배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학계의 이러한 주장은 경제악화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주체사상을 확립하고 인민들에게 민족의 우수성을 각인시키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