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초기의 토지제도
- 최초 등록일
- 2009.02.16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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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 초기의 토지제도를 정리한 레포트 자료입니다.
목차
1. 신라통일기 토지제도의 개편
1) 전후의 토지, 농업재건과 녹읍제의 폐지
2) 양전사업과 수취제도
3) 정전제의 실시와 녹읍제의 복설
2. 신라하대의 토지문제와 집권체제의 파국
1) 전장의 발달과 지주전호제의 확산
2) 녹읍.정전의 퇴훼와 조세제도의 마비
3) 농민항쟁과 호족의 토지. 농민지배
본문내용
1. 신라통일기 토지제도의 개편
1) 전후의 토지, 농업재건과 녹읍제의 폐지
6세기 초엽 집권체제가 확장되고 귀족간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사회모순 또한 증가하고 있었다. 삼국모두 사정이 비슷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영역의 확장, 인구의 확보였다. 이것은 삼국간의 전쟁을 야기했고, 이러한 가운데 통일된 신라의 당면한 문제는 인구의 감소와 유이, 농토의 방대한 황폐였다.
신라의 두 가지 과제는 첫째, 인구의 감소와 농업의 황폐화를 재건하고 복구하는 작업이며 두 번째는 왕조통합 및 영역확장과 백성의 증대에 따라 국가가구 및 제도 그리고 신분질서를 적절히 재편하는 것이었다. 산업의 재건은 각종 권농책으로 추진되었는데 이것은 장기간 대전란이 삼국의 영역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나라를 재조직하고 구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민심수습과 민인안정은 신라가 당군과의 전투에서 고구려, 백제유민들의 힘에 의존하고 당군격퇴 후 재건사업에서는 이들의 노력이 필요하였다는 것에 의한다.
신라는 이러한 이유에서 안도책의 골자로써 고구려, 백제의 유민을 그대로 신라의 민인으로 삼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농지의 개척, 개간과 농업의 개량은 농업을 증진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이 같지만 전자는 물력과 인력이 다수 투하되어야 하기에 국가기구 및 귀족층에 의해 주로 추진되었고 농민은 단순히 노동력의 일환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후자는 생산자인 농민에 직접 의거하였을 것이다. 신라는 통일 후 영토에 대한 제도정비에 나섰고 9주 5소경 제도는 지방제도 정비와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신라의 토지개척, 개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방제도정비와 더불어 여러 주에 민을 이주시켰다. 이것 또한 토지개간에 필요한 노동력의 확보가 주된 이유였다. 이러한 정책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성과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저수지의 보수, 신축 및 하천의 제방 공사 또한 신라조정이 지속하여 추진하던 사업이었다. 이것은 신라가 농업생산 가운데서도 미곡생산에 각별히 노력하였다는 증거이다. 즉 수전과 저수지의 개발도 농업활동에서 중요한 정책 중에 하나였다.
참고 자료
수업 강의 교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