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외교
- 최초 등록일
- 2009.02.09
- 최종 저작일
- 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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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태국의 외교를 순차적, 사건별로 모두 모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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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전근대 시기
2. 유럽열강의 침투와 독립의 유지
3. 제2차 세계대전과 이중외교
4. 전후 친미외교
본문내용
3. 제2차 세계대전과 이중외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태국은 연합국에 선전포고하고 1940년에는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했다. 태국은 1930년대 일본의 동남아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본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국제연맹에서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난했을 때 태국은 비난을 자제했다. 일본을 따라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도 했다. 그 대가로 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힘을 빌어 인도차이나에 있던 프랑스 군대가 유럽 전선으로 옮겨간 틈을 이용, 프랑스에 빼앗겼던 캄보디아의 바탐방 일대와 라오스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에 태국이 되돌려 받은 메콩강의 서쪽 둑 지역은 다시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반환되었다. 이것은 욱일승천 기세의 일본과 맞붙어 입게 될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적대적인 일반 국민의 정서는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무시됐다.
태국은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였지만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았다. 피분 수상은 일본이 주창하였던 대동아공영권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태국정부는 일본에 기술적으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태국에는 5만명정도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편 태국인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자유타이운동을 결성하였다. 이 운동단체는 일본에 대항하여 태국인이 만든 독립운동단체였는데 처음에 주미 태국대사였던 친미파 쎄니가 주도했으며 국내에 있던 쁘리디는 이에 호응하여 국내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 친미파인 이들은 이미 피분 군사정부를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전후 태국이 유리한 조건에서 연합국과 협상하는 데 크게 일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제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련의 태국의 외교를 전형적인 이중외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4. 전후 친미외교
일본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태국은 또 변신했다. 국왕은 대미, 대영 선전포고가 무효라고 발표했다. 주미 대사였던 쎄니 프라못을 총리로 기용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