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건축분석_사람/공간/디자인 언어
- 최초 등록일
- 2009.01.07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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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동성당 건축분석_사람/공간/디자인 언어
목차
1. 건축개요
2. 시대적 배경
3. 명동성당의 특징
1) 건축양식
2) 배치
3) 평면구성
4) 입면구성
4. 디자인 언어(건축요소)
5. 적용하기 - 명동성당의 디자인 언어
1) 공간성
2) 벽면
3) 기둥
4) 개구부
5) 지붕
6. 보충자료
7. 연구후기
8.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국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래로 전통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조정의 극심한 탄압에 의하여 여러 차례의 대규모 박해를 당함으로써 많은 신도와 성직자가 순교하게 되었지만 박해 후 살아남은 신도들은 계속해서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철종의 즉위로 어느 정도 자유가 묵인되기는 했으나 대원군에 의해 또다시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된다. 문호가 개방된 이후 탄압은 약해졌으며 한불수호조약 이후 외국인에 한하여 신교의 자유가 승인되면서 종교자유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한불수호조약 전후 무렵 교회가 부지 구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모든 것이 불비했으며 기공 직전까지 건축대지에 대한 전망마저도 불투명한 현실 속에서 명동성당의 건설은 건축적으로는 일면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천주교 조선교구는 1883년 현 대지를 매입하였다. 이 대지는 명례방 장악원(掌樂院) 옆의 언덕으로, 판서(判書)를 지낸 윤정현(尹定鉉)의 집이었다. 그의 집은 바깥채만도 60여칸이 되어 처음에는 이 건물을 교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1887년 본격적인 정지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888년에 조선 정부는 이곳이 열왕(列王)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의 주맥(主脈)에 해당되는 곳으로 영희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역이므로 건축이 불가하다는 풍수지리(風水地理)적인 이유를 들어 정지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청하였다. 이 분쟁은 1890년까지 계속되다가 프랑스공사관의 노력으로 토지소유권이 천주교 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89년에는 대지에 목조 2층의 고아원을, 1890년에는 주교관을 건립하였다.
1892년 8월 5일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고, 1898년 5월 29일에 축성식(祝聖式)을 거행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이 걸린 이유는 청일전쟁의 발발과 설계자인 코스트 신부의 별세(1896년 2월) 등이었다.
참고 자료
다큐멘터리 명동성당100년. 임정의. 코리언북스, 1998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효형출판, 1998
형태로부터 장소로. Pierre von Meiss, 정인하, 여동진 공역. Spacetime,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