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 삼별초:진도의 또 다른 고려 정부
- 최초 등록일
- 2009.01.05
- 최종 저작일
- 2008.10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목차
1. 서론
2. 본론
① 초기의 항쟁
② 진도에서의 항쟁
- 삼별초가 진도를 택한 이유
- 진도에서의 항쟁의 정통성
- 삼별초의 세력권
- 민심의 호응
③ 제주에서의 항쟁
- 삼별초의 최후
3. 결론
본문내용
2. 본론
2-1. 초기의 항쟁
① 삼별초란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이 부대를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처음에는 야별초라 불렀던 부대로, 애초의 목적은 도적을 막는 것이었다. 최우에 의해 조직된 야별초는 그 수가 많아지면서 좌우별초로 나누어졌다. 몽고 침입시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국인들이 돌아오자 그들을 중심으로 신의군을 편성하였다. 좌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라 하였다.
최우가 나라안에 도둑이 많음을 걱정하여 용사(勇士)를 모아 밤마다 돌아다니며 폭력을 금하게 하였는데 야별초(夜別抄)라 이름하였다. 도둑이 여러 도에서 일어남으로 별초(別抄)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였다. 그 군사가 너무 많아 드디어 좌우별초(左右別抄)로 나누었다. 또 국인(國人)으로서 몽고로부터 도망하여온 자로 일부를 만들었는데 신의군(神義軍)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별초(三別抄)이다.
② 초기의 항쟁
삼별초가 진도로 정부를 세우기 전까지의 사건의 흐름은 왼쪽과 같다. 1231년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는 이듬해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를 단행한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강화에서의 대몽항쟁도 헛되어 결국 원종은 몽고에 굴복해 개경환도를 결정하고 삼별초를 해산시켰다.
원종 11년(1279) 재추가 모여 개경 환도를 정하고 이를 알리니 삼별초는 따르지 않고 멋대로 정부의 곳간을 열었다.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반(叛)하여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협박하여 왕을 삼아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대장군 유존혁(劉存奕), 상서좌승(尙書左丞) 이신손(李信孫)을 좌우승선(左右承宣)으로 삼았다.
위의 사료에서 보듯이 고려가 삼별초를 해산시켰지만, 그들은 고려왕조가 몽고에 굴복한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진도에 정부를 세우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외교 문서를 보내 진도로
참고 자료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허용범지음 p.154~p.156
-「역사스페셜2」 정종목 p.262~p.280
- 전라남도 고흥구청 http://goheung.go.kr/main.html
- 논문 : 삼별초(三別抄)의 남해 항쟁(抗爭) 배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