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정의 개혁정치
- 최초 등록일
- 2009.01.01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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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거정의 개혁정치에 대해서 서술했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ⅰ. 장거정의 성장
ⅱ. 장거정의 개혁
1.정치 개혁
2.군사개혁
3.재정개혁
1) 재정지출의 합리화
2)부세제도의 개혁과 강남지주층 견제
ⅲ.장거정 개혁의 비판
ⅳ.장거정 사후 명 사회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이갑제의 성립으로 인하여 명초에는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었다. 국가권력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갑제 및 이노인 체제하에서 비교적 안정을 이루며 유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대의 중기인 15세기 중엽에서 후기에 걸쳐 점차로 이갑제가 변질·해체되었다.
관리의 부정부패가 만연되고, 정부에서는 토지와 호구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어렵게 되었다. 신종(神宗;1573~1619)이 10세로 등극한 16세기 후반(1573)은 명의 정치, 사회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가 진행된 시기이다. 즉, 밖으로는 북로남왜의 화가 계속되었고, 안으로는 명대사회를 지탱하여 오던 이갑제가 붕괴되면서 사회전반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대학사인 장거정(長居正;1525∼1582)이 전권을 장악하여 10년간 과감한 혁신정치를 추진하면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글에서는 장거정이 단행한 정치·군사·경제 개혁을 살펴보는데 특히, 장거정의 개혁 중 가장 두드러진 재정개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Ⅱ. 본론
ⅰ. 장거정의 성장
장거정은 만력 초 10년간 내각수보로서 전권을 행사하였는데 그의 정치적 수완은 융경 초에 입각하면서부터 발휘되었다. 가정 41년 수보가 된 서계는 양정화가 시도하려 했던 『공론정치』를 계승하여 언로를 개방하였는데, 가정 45년(1566) 세종이 죽자 그의 유조문제로 각신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가정 연간의 관료처벌 등의 실정을 시인하고 계승자가 그것을 시정해주기를 바란 유조는 서계에 의해 작성되고 목종(穆宗;1567~1572)의 승인을 받았다.
서계의 비호를 받던 한림학사 장거정도 목종의 즉위와 함께 대학사가 되어 유조작성에 참여하였다. 서계는 이로써 세종의 실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가정시기 탄핵받은 인사를 복권시킴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어 수보로서의 권한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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