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분쟁의 개요와 현황
- 최초 등록일
- 2008.12.30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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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티벳분쟁의 개요와 현황
목차
1. 티베트 분쟁에 대해서
2. 티베트 분쟁의 개요
3. 분쟁의 발생과 그 후의 진행과정
4. 티베트 독립의 전망
본문내용
1. 티베트 분쟁에 대해서
티베트는 13세기 이후 중국의 통치와 영국의 영향을 번갈아 가며 받아 왔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1950년까지 티베트는 북경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 소위 맥마흔(McMahon) 라인이 히말라야 산맥 분수령에 설정되어 영국령인 인도와 티베트간의 국경선으로 간주되었는데, 영국은 동 라인의 서쪽까지만 행정권을 행사하여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중국은 티베트(서장)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많은 근거를 갖고 있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개입과 유사한 시점인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을 동원,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당시 티베트인들은 유엔, 인도, 영국 등에 지지를 호소하며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후 티베트는 1951년 5월 서장자치구(※ 중국에는 5개 자치구가 있음)로 통합되었고, 1954년 중국·인도간 협정에서 인도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1959년 3월 티베트에서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을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달라이 라마는 자치정부 관리 및 추종자 약 1,000명과 함께 인도로 망명하여 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동 폭동으로 인해 약 4만명의 티베트인이 사망하고, 동년 티베트 중부지역에서만 8만 7천명이 추가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9년은 티베트와 관련된 많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동년 1월 중국정부에 우호적이고 달라이 라마에 이어 서열 2위인 판천 라마가 사망하게 되어 중국으로서는 티베트에 대한 주요 통제수단을 잃게 되었다. 또한, 동년 3월은 1959년 티베트 폭동의 30주기로서 이로 인해 대규모 소요가 발생하는데 1989년 3월(천안문사태 3개월전)부터 1990년 4월까지 티베트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동 기간중 소요로 인해 중국의 군병력 및 치안인력 600여명이 사망하였으나, 티베트인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0년 1월에는 달라이 라마, 판천 라마에 이어 서열 3위인 카마파 라마(14세)가 인도로 월경하여, 달라이 라마의 환영을 받았는데, 카마파 라마에 대해 인도정부가 망명을 허용할 경우, 양국관계의 악화를 경고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