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3.1운동후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해방운동 및 신 국가 건설운동 그리고 좌우합작운동)
- 최초 등록일
- 2008.12.22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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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3.1운동이후의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신간회와 같은 좌우합작운동에 대새 설명하였습니다.
목차
1) 3.1운동후의 민족주의
2) 3.1운동후의 사회주의
2) 3.1운동후의 사회주의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3.1운동후의 민족주의
3.1운동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펼치면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개량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나뉘어졌다. 조선인 대지주, 자본가와 일부 지식인들은 3.1운동이 좌절한 뒤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총독부가 내건 문화정치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경제적으로는 실력을 기르고 사상적으로는 민족성을 개조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했다.
호남지방의 대지주이자 자본가인 김성수의 동아일보 계열은 민족개량주의의 본보기였다. 여기에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지식인, 종교인들이 모여들었다. 이광수는 1921년 5월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간직을 팽개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되었다. 그는 1922년 5월 최린이 경영하던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실어 민족개량주의를 대중에게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글에서 3.1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 없이 옮겨 가는 변화”라고 하면서 타락한 민족성 때문에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독립을 하려면 민족성부터 개조하고 수양동우회와 같은 단체가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1924년 무렵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민족독립을 드러내 놓고 부정하는 자치론을 주장하면서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1924년 동아일보 신년사설로 “독립운동을 일본이 허용하는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일제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산업진흥과 교육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고 했다. 이 무렵 김성수, 송진우, 최린 등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자치운동을 펼쳐 나갈 정치결사로서 연정회를 조직 하려 했다. 민족 개량주의의 이러한 의도는 동아일보 불매운동과 같은 민중의 세찬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실력양성론에서 자치론으로 이어진 민족 개량주의는 민족독립을 포기한 친일 타협 노선이었다. 3.1운동 뒤에 고양되던 사회주의운동과 대립하면서 민중을 기만한 민족개량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의 열기를 식히려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이바지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