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와 지눌, 의천의 사상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8.12.20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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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효와 지눌, 의천의 사상 비교
목차
<한국 불교 사상 - 원효와 의천>
■ 원 효
원효의 사상
■ 의천
□ 의천의 사상
■ 지눌
□ 지눌의 사상
• 신앙결사운동
※ 의천과 지눌의 사상 비교
본문내용
<한국 불교 사상 - 원효와 의천>
■ 원 효
출가한 뒤 스스로 첫새벽[始旦]을 뜻하는 원효라고 이름을 지었다. 원효(元曉 : 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이다. 원효는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불지촌은 발지촌 또는 불등을촌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자리가 남아 있고, 그 밑 골짜기에는 그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에서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을 섭렵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원효는 스스로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다가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義湘)과 함께 도당(渡唐)의 길을 떠났다. 이때가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그러나 육로로 고구려를 통과하다가 도중에 고구려 군에게 잡혀 귀환하였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로 남편을 백제와의 싸움에서 사별하고 홀로 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것은 655년에서 660년, 즉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실계(失戒)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실계 뒤 스스로 복성거사(卜性居士) 또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였다.
어느 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