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 최초 등록일
- 2008.12.10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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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영효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리포트
목차
1. 서론
2. 본론
(1)개혁의 꿈을 안고
(2) 내무대신이 되어
(3) 다시 망명객으로
3. 결론
본문내용
박영효는 1883년 지금의 서울시장과 같은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자 일본에서 견문한 제도문물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그가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일반대중에게 선전할 수 있는 신문을 간행하기 위해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부 내에 순경부를 설치하여 치안유지에 힘쓰기도 했다. 도시의 위생과 미관을 정비하기 위해 김옥균이 작성한 「치도규칙」을 토대로 도로정비도 했다. 길에 화장실을 만들어 그 때까지 도로를 화장실로 쓰던 풍속을 고치고자 했다. 도로정비를 위해 민가가 철거되자 일반인들의 불평이 일어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반발은 박영효의 개화정책에 위압감을 느끼고 있던 민씨척족들에게 그를 중앙권력에서 밀어내는 빌미기 되어 3개월 만에 한성부판윤을 그만두게 되었다.
한성 부판윤에서 물러난 박영효는 고종의 특별한 배려로 광주유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6개월여 동안 광주유수로 있으면서 신식군대 양성에 진력했다. 일본 육군호산학교에서 신식훈련을 받고 돌아온 사관생도 둘을 교관으로 삼아 광주의 남한산성에서 1천 명을 훈련시켰다. 이 때 훈련된 병력은 갑신정변 당시 청국군에 대항했고, 당시 교관들이 갑신정변 때 행동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883년 11월 박영효는 광주유수를 그만두었다. 박영효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민씨척족세력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광주유수직에서 물러난 박영효는 미국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려다가 1883년 12월 보빙사로 미국에 갔다가 돌아온 홍영식을 만나 개혁에 의기투합해 다시 개화에 힘쓰기로 했다. 그러나 개혁의 자금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가 있던 김옥균과 서광범이 1884년 5월 차관도입에 실패하고 귀국함으로써 개혁에 필요한 자금줄이 막히게 되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우호적이던 민씨척족정권의 대표주자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후 오히려 보수적으로 돌아서면서 이들과 손을 끊었고, 그 때까지 박영효 등의 개화정책에 동조하던 고종도 점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참고 자료
리포트에 기술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