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 최초 등록일
- 2008.12.08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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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재 신채호는 역사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민족사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사 연구를 통하여 `식민주의 역사관`이 갖고 있는 반민족적인 요소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이 때문에 신채호의 고대사인식은 기존 역사가들의 고대사 인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신채호의 독특한 고대사 인식을 『朝鮮史硏究草』에 수록된「평양패수고」,「전후삼한고」두 논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신채호의 생애를 통해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고대사 인식의 배경을 정리해보겠다. 다음으로 「平壤浿水考」,「前後三韓考」의 구체적 내용 속에서 그의 고대사 인식을 보고 이를 바탕으로 맺음말을 대신하여 신채호 사학의 의의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목차
단재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1. 신채호의 생애와 활동(1880-1936)
2. 신채호의 고대사인식의 배경
3.『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의 개요
4. 평양패수고를 통해 본 신채호의 고대사인식
5. 전후삼한고의 통해 본 신채호의 고대사인식
6. 결론
본문내용
단재 신채호는 역사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민족사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사 연구를 통하여 `식민주의 역사관`이 갖고 있는 반민족적인 요소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이 때문에 신채호의 고대사인식은 기존 역사가들의 고대사 인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신채호의 독특한 고대사 인식을 『朝鮮史硏究草』에 수록된「평양패수고」,「전후삼한고」두 논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신채호의 생애를 통해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고대사 인식의 배경을 정리해보겠다. 다음으로 「平壤浿水考」,「前後三韓考」의 구체적 내용 속에서 그의 고대사 인식을 보고 이를 바탕으로 맺음말을 대신하여 신채호 사학의 의의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申采浩의 생애와 활동(1880-1936)
단재 신채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가난한 농촌선비 신광식(申光植)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전통적인 유교교육을 받았으며 19세 되던 해인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하였고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그의 애국계몽활동은 1905년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술위원, 1906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06년부터 1910년 사이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있으면서 수많은 정치평론과 역사논문을 통해 반식민지적 민족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애국심을 고취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힘썼다. 그 중에서도 1908년 8월부터 12월까지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전통적인 유교사관과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참고 자료
사료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단재 신채호 전집 중편』,「조선사연구초」, 1972
단행본
이만열, 『단재 신채호 역사학 연구』,문학과 지성사, 1990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 엮음,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창작과 비평사 . 1994.
한영우, 『역사학의 역사』지식산업사, 2002
논문
이만열, 「단재의 고대사 인식시고」, 한국사연구, 1986
김현수, 「신채호 역사인식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대학원, 1995.
한국종교사학회,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학 연구」, 2005
그림 출처
박인호 옮김, 『조선사연구초』. 동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