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작가론-신재효
- 최초 등록일
- 2008.11.30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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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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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과 지방 향리로서의 신재효
2. 판소리 후원자 및 지도자로서의 신재효
3. 이론가 및 논평가로서의 신재효
4. 사설 개작자 또는 창작자로서의 신재효
본문내용
판소리의 수호자 신재효
신재효(1812 - 1884)는 19세기 후반 지방 향리 출신으로 광대가 아니면서도, 판소리의 심취한 후원가이자, 판소리 사설의 창작자, 이론가, 비평가 그리고 판소리의 지도자로서 창단의 바깥에서 당대에 가장 심대하게 판소리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문제적 개인이다. 신재효는 근대적 비평가가 작가와 독자를 매개유통시키고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과 안목을 제시하고 작가에게는 지적인 거울을 제공함으로서 어떤 방향을 제시하듯이, 광대들과 그 향유자들 사이에 개입하여 광대들에게는 자신들을 뒤돌아볼 수 있는 사회적 거울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향유자들에게는 판소리 예술에 대한 규범과 비평적 안목을 제시함으로서 판소리를 지적인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며, 어찌되었든 상하층을 아우르는 판소리의 국민예술화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이다.
신재효가 활동하던 시기는 판소리의 역사에서 ‘후기 8명창 시대’로서 판소리가 무르익어 예술적 완숙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어떤 예술장르든지 완숙기에 접어들면 이론적 점검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전과 중흥의 전망을 발견해나가기 위하여 수준 높은 감식안과 비평으로서의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신재효가 어떠한 활동과 업적을 통해서 이와 같은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시대적 배경과 지방 향리로서의 신재효
신재효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 봉건 사회가 막바지에 이르러 사회변동을 예시하는 사건들이 가시화되면서 봉건적 가치체계에 무너지고 사회적 급변이 진행되던 시대였다. 그가 태어나던 해(순조 12년, 1812)는 홍경래가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 관료의 횡포에 신음하던 백성을 모아 관서지방을 뒤흔들며 일어나서 조선왕조의 지배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해였으며, 이러한 왕조 말기적 사건을 시작으로 탐관오리의 수탈에 못 이긴 백성들이 곳곳에서 무리 지어 일어나 혹독한 수탈을 일삼던 관리를 쫓아내기도 하여 동학농민봉기의 조짐을 보이기도 하고, 천주교가 일부 지식인과 민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장차 서양문화가 우리나라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을 예고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향리 계층으로 반상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되고 이에 따라 상업을 근간으로 한 근대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실리를 추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현실적인 힘을 쌓아갔던 계층이었다. 신재효 가계는 그 아버지 대에 고창으로 이주함으로서 고창지방에 터를 잡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하였는데 경주인을 하다가 고창으로 이주한 후 관약방(官藥房)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후에 신재효의 활발한 향리 활동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현실 적응 능력도 있겠지만 그의 아버지가 고창 지방에서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지방의 토착 세력 출신이 아니라 서울에서 옮겨온 이주민의 아들인 그가 고창지방에서 토호세력을 제치고 향리의 직임을 맡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방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40세 전후에 이미 곡식 1천 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로서 확고한 기반을 닦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양성 기슭에 터 잡았던 그의 집의 크기만도 2천 평이 넘었다니 그의 살림 규모를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정병헌․이지영,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서울: 돌베개, 1998.
황패강 외, <한국문학작가론 3>, 서울: 집문당, 2000.
서종문, 「신재효와 판소리」, 『판소리의 지평』, 신아출판사. 1990.
이기형, 「단가의 범주와 신재효 가사의 성격」『판소리 연구』제10집, 판소리학회, pp.263-291.
강진옥․강한영외 다수,『동리연구』 창간호(1993)˜3호(1996), 동리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