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의 풍수지리적 영향에 대한 기행
- 최초 등록일
- 2008.11.25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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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원화성의 풍수지리적 영향에 대한 기행
직접답사를 통해본 화성의 풍수지리적 영향을 찾아보고 화성이 건축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현대의 화성을 재조명 해보았다.
목차
1-1.수원화성
1-2.화성의역사적배경
1-3.화성의 건축
1-4.수원화성의 풍수지리적 해석
1-5.화성의 주요 문화재
1-5-1.화홍문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용연
1-5-2.행궁
1-5-3.팔달문과 장안문
1-6.정조대왕과 화성
1-7.유천, 유경이라 불렸던 이름에 대한 의미
2.화성기행에 대한 고찰
본문내용
① 수원화성(사적3호)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묘(융릉)가 있는 화산근처 팔달산 아래를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만들고자 당시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성설을 계획안으로 1794년 정월(음력)부터 1796년 9월까지 2년여에 걸쳐 성곽을 축성하고 고을 이름을 수원부에서 화성유수부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성의 총둘레는 5520m이고 성곽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봄의 버들잎 같다’는 데서 유경(柳京)으로도 불려진 화성은 축성에 소요된 재용만 80만금이고 동원된 인원은 70여만명 이였다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유실되어 없어졌던것을 1975년부터 1979년도 사이에 정부의 국방유적 복원계획에 따라 3억여원을 투입 복원 및 보수되었다.
최근에도 복원 및 보수가 진행중이며 행궁의 경우 복원을 마치고 관광지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②수원화성의 역사적인 배경
-.정조대왕은 은퇴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 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축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 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ㆍ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