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민씨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8.11.15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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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성황후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이를테면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영어: 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과의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
목차
명성왕후 민씨 (1851~1895)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삼은 이유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대립한 이유
을미사변
외국인의 평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명성황후의 업적 ---
본문내용
명성왕후 민씨 (1851~1895)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서,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집안의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해 정권이 장악된 순조·헌종·철종의 3대 60여 년간의 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간택하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총명했기 때문에 왕비가 되고 몇 년 후에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서 흥선대원군과 정적의 관계에 놓이게 되어 결국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이 벌어진 원인은 궁녀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흥선대원군이 세자로 책봉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벌어지자 대원군의 정적인 안동 김씨 및 대왕대비 조씨의 세력 및 유림과 규합하고 유림의 거두 최익현에게서 흥선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1873년의 이 상소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고 명성황후는 일족인 민씨들을 등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는 등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1882년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켜 명성황후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으나 명성황후는 궁에서 빠져나와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하여 화를 면하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에 응하여 출동한 청군은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여 명성황후는 위기를 넘겼다. 그 후 명성황후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개혁이 늦추어지자 개화파의 불만이 증가하여 급진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급진 개화파는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시 청군이 개입하여 정권은 명성황후가 지원하는 온건 개화파에게로 넘어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