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대의 반란
- 최초 등록일
- 2008.10.08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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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청시대의 반란에 대한 보고서
목차
* 등무칠의 난
* 유육․육칠의 난
* 이자성, 장헌충의 난
* 삼번의 난
* 백련교의 난
* 태평천국운동
본문내용
반란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나 지배자에게 반항하여 내란을 일으킨 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 내지는 왕조든지 반란이 없었던 시기는 없을 것이다. 지배층이나 민중이나 당대 상황이나 환경에서 그들이 관철시키려던 주장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빈곤과 정치제도의 부패에 대하여 개선의 목소리를 냈으며, 정치적인 이념을 가진 반란은 나라의 부패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또한 사회가 불안정한 시기에는 천명을 미명으로 반란을 계속 일으켜나갔다.
나는 여기에서 명․청 시대에 일어난 반란에 대해 알아보고, 이 때 일어난 반란들이 사전적 이미에서 명명하듯이 어떠한 이유로 정부나 지배자에게 반항하여 내란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겠다.
명(明)은 이민족으로부터 한족의 지위를 회복시킨 왕조로, 주원장에 의하여 건국되어 1368~1644까지 유지된 왕조이다. 이러한 14세기부터 약 300년간에 걸친 명 왕조 치세하에, 중국은 세 차례의 전국적인 민중반란으로 동요되었는데, 15세기 중반의 정통(正統), 16세기 초의 정덕(正德), 17세기 전반의 숭정(崇禎)의 각 시대가 그것이다. 정통, 정덕기의 반란에 의해서 국가는 뿌리째 그 존립이 흔들렸고 반란을 진압한 후에는 권력기구에 적지 않은 수정을 가하게 되었고, 명말 숭정기에 일어난 반란으로 명조는 붕괴되었다.
먼저 명 중기, 즉 정통․정덕의 2대 반란시기를 대표하고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등무칠의 반란과, 유육․육칠의 반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 등무칠의 난
등무칠은 지주소작제가 발달해 있던 복건성에서 총갑을 맡았던 자로, 소작인들이 지나친 부담을 경감시켜 달라는 요구에서 출발해 정통 13년(1448) 2월에 민중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광부 출신, 비적집단, 각지 농민들이 등무칠 휘하로 결집해왔다. 등무칠은 관군 복병의 총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