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 최초 등록일
- 2008.10.08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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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 대한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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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장보고는 신라 무장(武將)이자 국제 무역가 이다. 그의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의 해적들에게 잡혀간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자 관직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이 사실을 왕께 보고하고 청해진(지금의 완도) 대사가 되어 군사를 양성해 해적을 소탕하였으며, 신라와 당나라, 일본을 왕래하면서 큰 세력을 이루었다. 그 무렵 그는 왕위 계승 싸움에서 밀려 난 김우징(신무왕)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자기 딸을 문성왕의 둘째 비로 삼게 하려다 실패하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8세기 후반 이후로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절정기를 이루게 하였으며 신라 말기 호족세력의 선구적인 정치가였다.
이러한 장보고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국내 정치 상황의 혼란을 들 수 있다. 신라는 8세기 말경에 오면 진골 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현저히 약화되고, 진골 귀족들은 왕경을 중심으로 권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위쟁탈전은 점차 지방과 연계되면서 실패한 세력은 지방에 새로운 근거지를 형성하여 전국적으로 분권화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신라하대 있어서 왕계의 변동에 따른 왕족간의 왕위를 둘러싼 자기 항쟁은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을 더해 주었다. 또 이와 같은 중앙에서의 분열과 대립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낳아 지방에서는 장보고와 같은 독자적인 세력의 대두와 성장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배경은 바로 유이민의 만연이다. 중앙통제력이 약화되어 일반백성들과 국과 권력 간의 마찰이 점차 커져가고, 또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기근현상으로 신라 출신의 유이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나갔다. 이와 같은 요인들이 장보고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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