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파산하재]고사성어의 시대적 배경
- 최초 등록일
- 2008.10.03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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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파산하재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나게 된 배경과 당시 시대상에 대해 조사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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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위의 글귀는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 이다. 시에 가득한 한탄의 어조는 전란의 상황을 원망하는 듯이 여겨진다. 과연 두보는 어떠한 상황에서 이렇듯 애절한 시조를 남겼을까. 두보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컬어진다. 두보는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다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고 한다. 두보가 연래의 희망을 성취하여 우위솔부 주조참군이란 관직에 오른것은 43세 때였다. 그럭저럭 희망도 성취되었고 앞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 돌연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당시는 시대적으로 변혁의 분위기가 일고 있었다. 당조의 제도가 모병제로 바뀌면서 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절도사의 세력은 계속 강화되었고, 병사와 절도사 사이에는 수양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맺는 가부자관계라는 사적인 관계가 성행해 군대 내에 사조직이 만들어졌다. 절도사는 일반적으로 장성 밖에서는 무장이, 장성 안에서는 문관이 겸임토록 했지만 점차 중앙정계에 영향력이 없는 무관이나 이민족 출신을 장성 내의 절도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안록산이 등장할 수 있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안록산은 소구드 계통의 혼혈인으로 평로절도사의 양아들이었다가 그의 사후에 평로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범양절도사와 하동절도사를 겸임해 세 번진을 장악하였는데, 휘하의 병력이 당조 전체 병력의 37%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755년 11월에 당시 재상이었던 양국충과의 권력다툼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파죽지세로 남하한 그는 한 달 만에 낙양을 점령하고 반년 만에 장안을 점령해 대연을 건립했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그해 5월, 장안도 위기에 빠져 현종 황제를 비롯한 장안에서 사는 과리나 귀족들은 도읍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두보 역시 처자가 있는 장안성의 동북방인 두메 산골로 목숨을 걸고 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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