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어그래? 조선왕조실록
- 최초 등록일
- 2008.08.31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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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어그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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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어그래? 조선왕조실록
본문내용
조선시대에는 왕이 승하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대 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 이용된 자료는 춘추관 시정기, 사초, 승정원 일기, 의정부등록, 비변사 등록, 일성록 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실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를 일컬어 ‘조선 왕조 실록’이라 부른다. 오늘날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일본과 친일 세력의 강요로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과, 한일 합방으로 물러난 순종의 실록은 일본인들이 만들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우선 그 양이 방대한 만큼, 조선시대의 사정을 가장 풍부하게 알려준다. 물론 왕과 조정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밑바닥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 왕조의 기록을 이만큼이나마 집대성 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왕조 실록’은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과 문학가들에게 연구와 장착, 그리고 상상력의 보고로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왕조 실록’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형식적인 일지가 아니라는 점인데, 무엇보다도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취지에 따라, 왕이 승하한 뒤 후대에 완성토록 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실록을 본 왕은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사관을 두어 왕의 언행을 가까이에서 기록해 사초로 남기게 했다. 이 사초는 나중에 실록을 작성할 때 중요 자료가 되었다. 띠라서 이 사초 또한 왕이 볼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선대 왕의 실록을 보는 것도 금지 되었다. 조선 초기에 실록과 사관제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나, 연산군과 같은 폭군의 재위 때에는, 실록과 사초의 열람 금지 원칙이 다소 시련을 겪기도 했다.
비록 사관 제도를 받아들인다 해도, 늘 가까이에서 자신의 언행을 빠짐없이 사초에 기록하는 사관은 왕에게 부담스러운 존재 일 수밖에 없었다. 왕 가까이 두 사람의 사관을 두어 좌측의 사관은 왕의 행동을, 그리고 우측의 사관은 왕의 발언을 기록했다. 이 같은 제도는 세종 때부터 시행된 것이다.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