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답사기
- 최초 등록일
- 2008.06.26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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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복궁 답사레포트입니다.
경복궁의 역사와 경복궁 안에 위치하고 있는 각 궁의 소개와 함께 직접 답사하면서
보고 느낀 위주로 쓴 레포트입니다.
목차
◆ 경복궁의 역사 알아보기
◆ 경복궁 들여다보기
1) 광화문(光化門)
2) 흥례문(興禮門)
3) 영제교(永濟橋)
4) 근정문(勤政門)
5) 사정전
6) 천추전
7) 만춘전
8) 강녕전
9) 교태전
10) 아미산
11) 경회루(慶會樓)
12)수정전
◆ 보고 느낀 점
본문내용
◆ 경복궁의 역사 알아보기
경복궁은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조선의 정궁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7일 송도 (현재의 개성)의 고려 왕궁인 수창 궁에서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한 다음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에 계룡산 신도 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궁궐과 도성의 축조에 착수하였다가 중지하였다. 태조는 즉위 3년에 한양 도읍을 결정하여 10월에 천도하고 다음해에 경복궁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이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 되었다.
이 궁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전소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그 후 왕궁으로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273년간이나 중건되지 못하였다. 고종 2년(1865) 고종의 생부인 흥선 대원군이 중건에 착수하여 고종 5년(1868)에 창건 당시의 규모로 복원하고 같은 해 7월에 고종이 창덕궁으로부터 이곳으로 왕궁을 옮겼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 10월 8일(음력 8월 20일)에 민비가 건청궁에서 일인 폭도들에게 시해 당하는 변을 당하고 이듬해 2월에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의 운명이 끝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경복궁 내의 200여 동에 달하던 전각은 거의 다 헐리고 경회루와 근정전등 10여동만 남았고 일본인들이 근정전 남쪽 정면에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음으로써 경복궁의 경관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경복궁은 그 경내가 150,000평으로 거의 장방형을 이룰 만큼 반듯하여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동쪽엔 건춘문(建春文), 서쪽엔 영추문(迎秋門), 북쪽엔 신무(神武)문이 있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울 때 동쪽 건춘문의 북쪽으로 옮겼는데, 6.25동란 당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 있던 것을 1963년 원래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경복궁 내에 있는 아미산과 향원정은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인공적인 건조물을 조화시킨 우리나라 고유의 정취 있는 전형적인 궁중 후원이며, 경회루와 그 연못은 오늘날 에도 그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이다. 경복궁에는 세종 16년(1434) 자동시계를 설치한 보루각, 세종 20년(1438)에 장영실이 만든 천상시계와 자동물시계를 설치한 홈경각 등이 건축되었다. 이 궁에는 세종 23년(1441)에 세계 최초의 측우기가 발명되어 설치되었고, 세종 25년(1443)에는 한글창제를 위한 정음청이 설치되어 1446년 한글이 반포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