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학]플로베르(Flaubert, Gustave)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8.06.25
- 최종 저작일
- 2007.12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플로베르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룬 글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걸작『보바리 부인』(1857)으로 유명하다. 당대 부르주아 계층의 생활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사회 풍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법정에 고발되기도 했다. 아버지 아실 클레오파스 플로베르는 상파뉴 출신으로, 루앙 시립병원의 수석 외과의사이자 임상교수였다. 어머니는 노르망디 지방 퐁레베크 출신인 의사의 딸로, 친정은 지방의 부르주아지답게 대대로 저명한 사법관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학교에 다닐 때 이미 작가생활을 시작하여, 1837년에『콜리브리』(`벌새`라는 뜻)라는 작은 잡지에 첫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젊은 철학가인 알프레드 르 푸아트뱅과 일찍부터 친구가 되어 그의 염세주의적 견해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접촉하게 된 저명한 외과의사들이나 병원, 수술실, 해부학 교실 같은 남다른 주변환경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플로베르의 지성은 전반적으로 활발해졌다. 그는 기존의 선입견들을 몹시 싫어하여 재미 삼아 그런 개념들을 모은 `사전`을 편찬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는 르 푸아트뱅과 함께 `가르송`(소년)이라는 기괴한 가공 인물을 창조하여, 천박하게 여겨지는 견해는 모조리 가르송 탓으로 돌렸다. 플로베르는 `부르주아`를 싫어했는데, 그가 말하는 부르주아란 `천박한 사고방식을 가진 모든 사람`을 의미했다.
1841년 11월 플로베르는 파리대학 법학부 학생으로 등록했다. 그러나 22세 때 그는 신경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특이한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 병은 간질로 해석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법률 공부를 포기했고, 그 결과 모든 시간을 문학에 할애할 수 있었다. 1846년 1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3월에는 사랑하던 누이 카롤린이 딸을 낳다가 죽었다. 그러자 플로베르는 어머니와 함께 갓난 조카딸을 데리고 루앙 근처의 센 강변에 있는 크루아세의 영지로 은퇴했다. 그는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846년 7월 파리를 방문했을 때, 플로베르는 조각가인 잠 프라디에의 화실에서 루이즈 콜레라는 여류 시인을 만났다. 루이즈는 그의 정부가 되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순탄하지 못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