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답사
- 최초 등록일
- 2008.06.14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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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대문형무소를 답사하고 사진을 첨부하고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살펴보기
1. 서대문형무소
2. 서대문형무소의 위치
3. 서대문형무소 명칭의 변화
4.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
5.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답사
1)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구조
2) 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3) 중앙사
4) 옥사
5) 공작사
6) 추모비, 사형장, 지하감옥, 망루와 담장
6. 문제점
7. 독립문
Ⅲ. 마치며
※ 참고 자료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2008년 6월 7일 답사를 다녀온 독립공원은 약 3만 평 규모로 평소에는 많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자 그 일대를 공원으로 꾸며 1992년 8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특히 서대문 형무소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이 녹아있는 곳이다. 하루 평균 1,500여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아 서울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망국시절과 독재시절에 애국지사와 민주인사들의 고난의 장소가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역사가 주는 교훈도 큰 것이다. 근현대 80여 년 동안 민족적인 양심과 시대적인 정의가 일제, 백색적색의 독재세력과 대결한 고난의 한 맺힌 장소인 것이다. 여기서는 서대문형무소의 위치, 명칭변화, 수감되었던 사람들을 알아보고, 답사하였던 사진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의 구조와 역할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살펴보기
1. 서대문형무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통칭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신축되었다. 일본 통감부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수감하기 위해 급조한 것이다. 일제는 강제합병을 앞두고 1907년부터 그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키기 위한 현대식 감옥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듬해부터 감옥을 짓기 시작했다. 일본인의 설계로 지어진 이 감옥은 당시 화폐 5만 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였다.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 시설로 수용 인원은 500명 정도였다. 당시 전국 8개 감옥 총 수용 인원이 30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규모의 감옥이었다
2. 서대문형무소의 위치
정부는 1988년 2월 27일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하여 시민공원으로 개방하였다. 이 자리는 일찍이 조선왕조 초기의 국사 무학 대사가 무악재를 넘으며 “터는 좋은데 3천 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참고 자료
<단행본>
∘ 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주)나남출판, 2000
<인터넷>
∘ http://www.sscmc.or.kr, 서대문형무소 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