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양반사회
- 최초 등록일
- 2008.06.12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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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양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 레포트 자료입니다.
목차
조선시대의 양반사회
Ⅰ 서론
Ⅱ 본론
1. 불가능한 양반의 신분조작
2. 족보조작은 불가능
Ⅲ 결론
본문내용
조선시대의 양반사회
Ⅰ 서론
임금이 조회를 받을 때, 남쪽을 향한 국왕에 대해 동쪽에 서는 반열이 동반(문반)이고 서쪽에 서는 반열이 서반(무반)이다. 그리고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했다.
본래 양반이란 관제상의 개념이었다. 976년 전시과를 실시하면서 시작된 이 관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지배신분층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숫자 역시 고려 후기보다 현격하게 줄어들어 소수의 특권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양반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몰락했고, 18~19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신분제의 문란과 함께 신분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그 숫자가 대거 늘어났다. 이때 군공, 납속 등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사람들도 많았지만 상당수가 유학모칭 이라든가 족보 위조 등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양반 이동을 꾀했다는 것이다.
Ⅱ 본론
1. 불가능한 양반의 신분조작
당시의 기록을 보면, 오히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양반층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조병오소회등록⟫에 수록된 별군직 손상룡의 기록을 보면
“대저 (경상도) 71주州 가운데 예부터 양반이 없는 읍은 7곳인데, 이는 대개 해변의 7읍으로 (이곳에는) 본래부터 사족이 없었고 향족만 있었다. 그러므로 (경상도에서) 양반이 없는 읍은 단지 7읍뿐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래로 과거 출신자가 없고. 또한 (양반) 가문과 결혼에 실패하여 차츰 향족만이 있는 읍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양반이 없는 읍이 지금은 15읍이 되었다.”
여기서 ‘지금’이란 1786년(정조 10)을 가리킨다. 그의 말을 정리하면, 한마디로 경상도 지역에서 양반층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조반정 이후 충청․전라도를 기반으로 하는 서인이 계속 집권하면서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남인의 과거 합격자가 저조했던 상황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점은 그가 양반의 지속 요건으로 ‘과거시험’과 ‘양반과의 결혼’이란 제한된 조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호족에 기재된 유학 따위는 고려할 여지도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양반 신분을 조작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