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웰 모형을 이용한 청계천 복원사업
- 최초 등록일
- 2008.06.05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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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계천에 대한 복원 사업을 라스웰 모형으로 분석하였다.
목차
정보의 수집․분석․전파
지지획득
정책입안
정책수정
정책집행
1)일반시민과의 갈등관리
(1)공동목표와 발전적인 미래상 제시
(2) 적극적인 홍보
(3) 정책추진체제의 신뢰성 확보.
2) 지역주변 상인 등 이해 당사자를 위한 갈등해결
(1) 충분한 의견수렴과 절차적 정의 확보
(2) 보상체계의 구축
(3) 정책추진자의 인지적·정치적 전략
(4)주민·상인 협의회 구성
종결
1)안전적인 측면
2)환경적인 측면
3)문화적인 측면
4)산업적인 측면
평가
청계천 복원 정책의 특징
본문내용
청계천복원 사업은 2003년 말에 서울시가 시행한 한 조사에서 최고의 시정으로 뽑혔다.
청계천의 이름은 開川으로서울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연장 10.92㎞의 도시 하천이다. 총 면적 50.96㎢으로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도성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태종때 자연천으로 정비를 하면서 둑을 쌓아 하천의 모습을 만들었고 이후 세종때 지천과 세천에 대한 추가정비를 하였다. 영조 때 하천 배수시설 확장과 대규모 준설작업을 통한 일거리로 빈민들을 구휼하고자 하면서 지금의 청계천 모습이 완성되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청계천은 하수구로 전락하였고 광복과 전란이후 슬럼화 되면서 위생과 도심경관이 개선을 목적으로 청계천 복개 계획이 세워졌다가 경제적 비효율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청계천 복원사업이 이루어 진 것이다.
정보의 수집․분석․전파
조선 시대 - 청계천의 개수공사가 실시되기 이전까지는 제방시설이 없어서 여름철 강수량이 많을 때는 미쳐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하고 범람하여 일반가정에 침수가 극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많은 빈민들이 움막을 짓고 생활하였기 때문에 환경이 불경하여 전염병의 온상지가 되기도 하였다. 1760년(영조 36년) 2월 18일 청계천에 대한 준설공사를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때의 공사는 규모면에서나 비용 면에서 조선이 창건 된 이후 가장 큰 준설공사였다. 때 청계천변에 가설된 수표교는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가 발생할 때 인근의 주민들을 대피시켜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기여하였다.
이후로도 청계천은 홍수피해 방지와 원활한 물의 흐름을 위하여 수차례의 준설공사를 실시하였다.
일제 강점기 - 일제는 영원한 조선 지배를 위해 청계천을 하수도 기능으로 전락시키고, 홍수로부터 일본인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1918년부터 청계천과 그 지류에 대한 준설작업에 착수 하였다. 1937년 일제에 의한 청계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었다.
참고 자료
청계천 관련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