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 최초 등록일
- 2008.05.28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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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입니다.
레포트형식입니다.
참고문헌 4권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2008년 5월 28일 자로 완성한 것 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쌍십협정(雙十協定)과 내전의 발발
3. 국민당 치하의 혼란
4. 내전의 확대
5.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6. 모택동이 평가한 장개석
7.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중국내의 양대 세력이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1930년대 말, 일본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하게 된다. 그 결과로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되나, 항일전의 종료는 내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전을 불 보듯 뻔한 일이 었다. 이렇게 시작한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고 그 내전의 결과물로 생겨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 즉 45년부터 49년까지의 중국의 시대 상황을 알아보겠다.
2. 쌍십협정(雙十協定)과 내전의 발발
전쟁종결 직후부터 장개석은 모택동에게 세 차례 전보를 보내 국가대계(國家大計)에 대하여 중경에서 의논하고 싶다고 하니 모택동도 이에 동의하였다. 45년 8월 28일 모택동, 주은래 등이 미국대사 헐리와 함께 중경에 도착하여 국공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담은 난항하였다. 특히 공산군의 해체, 해방구정권의 해소, 헌법제정의 문제는 쉽게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40여일 걸린 교섭은 결국 ‘장기적으로 합작하고 단호하게 내전을 피하며, 독립․자유․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하여 철저하게 삼민주의를 실행할 것’, ‘정치협상회의를 열어 평화건국방안과 국민대회소집 문제를 토의할 것’에만 합의한 채 45년 10월 10일 쌍십협정이 발표되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 협정에서 공산당은 군대의 축소 등 국민당에게 대폭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당은 화평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해방구에 대한 무력 공격의 준비를 하여 10월 중순에 공격을 개시하였기 때문에 내전의 위기가 일거에 고조되었다. 미국은 대전 후 세계의 최강국으로서 자본주의 세계의 유지를 임무로 삼게 되었으나 유럽의 안정을 제일로 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내전이 일어나더라도 전면적으로 군사 개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참고 자료
박원호, 『중국근현대사』, 지식산업사, 1991
김희교, 『현대중국을 찾아서2』, 이산, 1998
조훈, 『강좌 중국근현대사』, 역사교양사, 1999
박종귀, 『마오저뚱의 인물평』, 한국학술정보,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