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설화로 전해져 오는 서동요가 갖는 역사적인 측면에 대해서 쓴 논문 으로 설화와 역사의 연관성을 담고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서동의 실체
1. 서동의 탄생
2. 4가지 이견
3. 서동의 즉위
Ⅲ. 선화공주와의 혼인
Ⅳ. 미륵사 창건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Ⅱ. 서동의 실체
1. 서동의 탄생
서동설화에 따르면 마를 캐던 서동은 왕이 된다. 여기서 훗날 왕이 된 인물이 어떻게 하여 마를 캐며 살아가야 했는지에 대한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서동은 과연 누구인가에 하는 문제는 먼저 서동의 출생에 관한 의문부터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무왕의 이름은 장으로 법왕의 아들인데 위풍이 뛰어나고 지기가 호걸하였다. 법왕이 즉위하였다가 그 다음 해에 돌아가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서동이 《삼국사기》에 나온 것과 같이 법왕의 직계 아들이었다면 왕궁이 아닌 수도에서 떨어진 익산 지역에서 마를 캐며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삶을 살았을 리 없는 것으로 보아 서동을 법왕의 직계 아들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그 당시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임을 고려할 때 서동이 평민이거나 왕족이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으로 보아 서동은 왕족의 혈통임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용은 왕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용으로 묘사된 서동의 아버지를 일개 범인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왕족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할 것이다.
또한 법왕의 직계 아들이 아니라면, 서동은 어느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익산에서 마를 캐며 어머니와 단 둘이 살게 된 것은 어떠한 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문이 몰락하였거나 혹은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수도에서 떨어진 익산지역으로 도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서동이란 이름도 신분이나 출신을 감추기 위해 마를 캐며 살았다는 이유에서 붙여진 별칭으로 볼 수 있다.
2. 4가지 이견
서동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서동설화의 성립, 서동과 선화 공주의 혼인, 서동의 왕위 즉위, 미륵사 창건, 백제와 신라의 관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와 그 의미가 재해석되어야하므로 그가 누구인지 밝히는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서동을 실존 했던 인물로 즉 서동이 나중에 백제왕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백제의 왕으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가 어떤 왕이었는지에 대한 4가지의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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