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독후감입니다.
- 최초 등록일
- 2008.05.07
- 최종 저작일
- 2006.12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독후감입니다.
역사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본인 의견을 중심으로 썼습니다.
목차
Ⅰ. 서론
1. 우암 송시열, 엇갈리는 평가
2. 현대에도 끝나지 않은 논쟁
Ⅱ. 송시열, 그의 내면이 궁금하다
1. 그가 주자를 ‘선택’한 이유 - 송시열은 학자가 아니라 정치가이다
2. 효종의 북벌과 송시열의 북벌 - 우암의 신(神)에 좌절하다
Ⅲ. 조선은 붕당 때문에 망했을까? - 송시열과 그의 붕당에 대한 작은 변명
Ⅲ. 송시열을 평가한다
본문내용
Ⅰ. 서론
1. 우암 송시열, 엇갈리는 평가
우암 송시열, 그는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대정치가이다. 여기서 ‘대’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이유는 그의 학문이 그만큼 고명하고 그의 정치가 그만큼 고결했다는 듯은 아니다. ‘대’라는 접두사를 붙여야 할 만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영향에 대한 평가의 긍, 부정은 일치하지 않는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됐으며 그 언급된 이름의 횟수만큼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논란의 양극단엔 항상 다른 당파들이 있었다. 송시열의 당이었던 노론에서는 그를 성현이라 부르며 의리의 인물로 분류했으나 그의 반대 당파인 남인과 소론은 그를 저주하고 증오해 마지않았다. 이 뿌리 깊은 저주는 83세의 유배 중이던 노인을 죽이고서야 끝나게 된다.
그에 대한 반응이 어느 정도로 상반되는지는 그의 죽음을 전하는 두 기록자의 서로 다른 시각에서 잘 드러난다. 노론계 인사로 보이는 김재구가 저술한 『조야회통』이 전하는 그의 죽음의 장면은 ‘그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었으며’, ‘규성이 땅에 떨어져 붉은 빛이 우암이 죽은 지붕 위에 뻗쳤’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즉 천하의 문운이 다하는 것 이었다.
하지만 소론 나량좌가 쓴 『명촌잡록』의 기술은 정 반대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송시열은 숙종의 조부모인 효종과 명성황후의 어찰을 빙자해 목숨을 구걸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사약 마시기를 거부하는 추태를 부리다가 추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가 어떤 인물이길래 이러한 극단적인 찬사와 극단적 저주를 받았던 것일까?
2. 현대에도 끝나지 않은 논쟁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가 출간되었을 때 그의 책은 송씨 문중에 의해 노상에서 수십권이 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우암 송시열>이라는 책이 함께 출간되었다. 책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다.
“그는 대학자였고 고집 센 이데올로기스트였지만, 무엇보다도 바른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준 실천가였다. 그는 부정부패를 미워했고 가난한 가운데도 검약을 신조로 삼은 생활인이었다. 의리에 어긋나는 일 앞에서는 행, 불행을 가리지 않고 이들 막고자 한 결과 마침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절대적인 군주권에 의해서 송시열은 죽었다. 양심적인 지식인의 수난인 것이다. 그것은 절대 권력의 폭거에서 온 결과이며 정상적 사회 운영이 결여된 시대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
그렇다. 현대에도 송시열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한 쪽에서는 찬양에 가까운 전기문이 출판되고 한 편에서는 송시열을 붕당정치의 괴수로 보고 있는(이덕일은 송시열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로 썼다고 밝혔으나 내용은 비판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 역사서가 출판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시각을 가지려 노력하며 우암 송시열이란 인물과 그가 한평생을 몸 담았던 당쟁에 대해 내 나름대로 평가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