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론
- 최초 등록일
- 2008.04.10
- 최종 저작일
- 2005.03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신재효에 대해 요약한 글입니다.
목차
제5장 신재효론
1. 신재효의 생애
2. 문학
3. 신재효본의 판소리사적 의의
본문내용
1. 신재효의 생애 .
신재효는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로서 19세기 초 전북 고창에서 서리층에서 속했던 평산(平山) 신씨(申氏) 가문에 태어났다. 신재효의 소년기 교육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20대에는 상처를 두 번씩이나 하였고 33세 때에는 부친상을 당한다. 그 이듬해 34세 때부터야 비로소 활동상이 나타난다.p164
50대에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사업에 원납전(願納錢) 500냥을 기부한다. 경복궁이 준공되어 낙선연(落成宴)을 베푸는 자리에도 판소리 제자 진채선(陳彩仙)을 보내 자기의 작품을 부르게 해 대원군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이런 일들로 고종으로부터 정3품과 종2품의 벼슬을 받지만, 실직(實職)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57세에 세 번째 부인마저 잃게 된다. 이것이 그가 오직 판소리에만 더 빠져들게 한 원인이라 추측된다.
60대 이후에 황해 감사를 지낸 바 있는 미금당(美錦堂) 정현석(鄭顯奭)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여기에는 판소리에 관한 미금당의 견해와 동리의 판소리에 대한 업적 등이 언급되어 있다.p165 그리고 당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자서가(自敍歌)>라는 단가를 짓는다. 또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불란서군 처치를 찬양한 <괴씸한 서양되놈>, 나라를 걱정하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어 한 발짝씩 걸으며 지었다는 <십보가(十步歌)> 등도 지었다. 그리고 흉년이 들자 사재로 많은 기민을 구출하였는데, 그의 애민정신은 <치산가(治産歌)>에도 잘 나타나 있다. 73세가 되던 해, 1884년 11월 6일 기묘하게도 그가 세상에 태어난 바로 그날 생을 마감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