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4․3사건과 미국의 역할 에 대한 논문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4․3사건의 초토화 작전과 피해 상황
1. 피해 상황
2. 피해 상황 분석
ㄱ. 초토화작전의 배경
ㄴ. 대량학살의 실상
Ⅲ. 미군정의 대제주도 정책과 4․3사건에서의 역할
1. 미군정의 대제주도 정책
2. 미국의 책임
Ⅳ. 결론
※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4․3사건은 제주도당 남로당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봉기한 이후 1954년 9월 21일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무장대(남로당의 산하집단)와 토벌대(국가의 무력기구로서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무력충돌로 인해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비무장 민간인으로 어린이와 여성, 노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4․3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를 넓게 본다면 4.3 이전과 4.3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4․3 이전은 인민위원회가 제주도에서 자치를 주도했던 시기(1945.8.15.~1947.2.28.)와 3.1절 발포사건과 총파업을 계기로 인민위와 미군정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던 시기(1947.3.1.~1948.4.2.)이다. 4.3 이후는 크게 4시기 정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기준으로 다시 재구성한 것이다.
제 1기는 무장대가 봉기한 이후 미군이 사건의 진압을 하지 못하고, 결국 제주도에서 5․10 단독 선거를 보이코트하는 사태가 벌어진 시기이다. 제 2기는 사건을 진압하려고 했던 토벌대가 점차 무력을 강화하여 무장대와 충돌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펼쳐 주민들이 집단적인 희생을 당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제 3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초토화작전’ 이후를 제 4기로 볼 수 있는데 사태를 평정하고 종결하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렇게 약 6년에 걸쳐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제주도민은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초기에는 이와 관련하여서 ‘폭동론’을 제외하면 거의 논의가 되지 않았다. 반공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던 4․3사건에 관한 연구는 6월 민주항쟁 이후로 활발하게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연구자들이 4․3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파악하여 사건의 실체를 파해치는데 집중하였다면 최근의 연구자들은 4․3사건의 의의를 탐구하여 역사적인 과제를 제기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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