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 최초 등록일
- 2008.03.03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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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미양요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목차
진행
경과
결과
미국의 실패원인
신미양요의 전개과정의 구체화
본문내용
고종 8년(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1866년 8월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이 사건은 그 뒤 리델 신부를 통해 각국에 알려졌다. 미국은 즉시 베이징에 있는 미국 공사에게 훈령을 보내어 조선에 대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고,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진행⇒ 미국은 고종 8년(1871)인 신미년 4월에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로 하여금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을 이끌고, 5월 16일 조선원정길을 떠났다. 로저스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와 함께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로 협상을 진행시키겠다는 포함책략을 수립한 뒤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조선 정부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격퇴한 이후,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강화도 연안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있었다.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진을 공격해 온 미군을 맞아 광성진과 갑곶쪽에서 백병전까지 벌이는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광성진을 일시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군민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40일 만에 우리나라에서 물러가고 말았다.
경과⇒ 미국의 강화도 침략은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다만,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 다른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미국은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개항을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침략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이양정책을 이기지 못하여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한다. 조선은 미국함대의 철수가 미국이 패하여 돌아간 것으로 간주하였고, 더욱 문을 굳게 닫게 된다.
결과⇒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이후 전국의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도 싸우지 않는것은 나라를 파는것"이라는 척화비를 세워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미국의 실패 요인
● 미국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된 강화해협을 허가없이 미군함대가 들어온 것은 주권침해이며 영토 침략행위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