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에 관한 진실
- 최초 등록일
- 2008.02.04
- 최종 저작일
- 2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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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항쟁에 관한 진상 규명
목차
▶4. 3 항쟁 직전의 제주도 상황
▶ 4.3 항쟁직전의 주요 사건들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준비
▶4.3사건의 전개 과정
▶진상규명운동
☆ 출처
본문내용
▶4. 3 항쟁 직전의 제주도 상황
1.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
태평양 전쟁 말기 전략적 요충지라는 특성 때문에 종전 당시 제 58군의 일본군 병력이 6만 여명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미군이 제주 섬에 상륙했을 때 도민들을 산으로 끌고가 군과 행동을 같이 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찾아옴으로써 제주도민들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2. 귀환인구 급증
종전 후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귀환하고 외지로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다. 이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광복 후 제주도의 정치적 긴장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3. 사회혼란 가중
광복 이전 제주도는 공산품의 40%가량을 일본에서 구입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대일 교역이 통제되자 심한 생필품 부족 현상이 일어났고 더욱이 콜레라의 만연, 극심한 보리농사 흉년 등으로 사회혼란이 더욱 가중 되었다.
※정치적상황
1.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
광복당일 당시 조선건국동맹을 이끌고 있던 여운형 주도로 독립 국가의 탄생, 치안확보, 현존 시설 보존 등을 기치로 내걸고 결성하였다. 제주도에서도 1945년 9월 10일 오대진을 위원장으로 하여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중앙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창건 선언을 하였고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조직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도에서도 9월 22일 제주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인민위원회의 초기 활동은 치안에 주력했으며(주로 청년동맹제주도위원회) 농사교육, 학습회, 문맹퇴치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의 특성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자치기구이고, 항일투쟁 경험자들이 주도하였으며, 온건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또 미군정중대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였고, 도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존속기간이 가장 긴 자치기구 였으며,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와도 거리를 둠으로써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2. 남로당의 성립과 우파의 움직임
참고 자료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공식사이트(www.jeju43.go.kr)
제주도지 역사편
제주 4.3연구(역사문제연구소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