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 업적][다산 정약용 사상][다산 정약용 세계관][다산 정약용 문화론적 이해]다산 정약용 고찰(다산 정약용의 업적, 다산 정약용의 사상, 다산 정약용 세계관, 다산 정약용 문화론적 이해)
- 최초 등록일
- 2008.01.15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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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정약용의 업적과 사상에 관한 고찰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정약용의 업적
1. 학문에서의 업적
2. 과학기술 발달의 업적
3. 다산 정약용의 역학(易學)에 끼친 영향
Ⅲ. 정약용의 사상
1. 철학사상
2. 실학사상
3. 다산의 교육 사상
4. 다산의 정치 사상
5. 다산의 경제 사상
6. 다산의 사회 사상
7. 반(反)풍수사상
8. 반(反)지역차별 사상
9. 문학사상
10. 다산의 인간관과 목민사상
Ⅳ. 정약용의 세계관과 문화론적 이해
1. 자연관: 개척의 대상으로서의 물(物)
2. 인간관: 욕망에 대한 낙관론
3. 사회관: 민권사상과 계약론적 발상
Ⅴ. 결론
본문내용
다산은 영조 38년(1762) 6월 16일 아버지 나주 정씨(羅州 丁氏)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주 정씨는 처음 본관을 압해(押海)로 하였으나 영조 때 나주로 본관을 바꾸었다. 시조(始祖) 고려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6세(六世) 공일(公逸)까지 압해도에 거주하였고 7세(七世) 원보(元甫)가 황해도 덕수(德水)로 이거하였다.
시조 이하 6세의 분묘는 압해도에 있었으나 고려말 압해도가 왜구의 침탈로 실토(失土)됨에 따라 소실되었다. 압해도는 본래 군치(郡治)의 섬으로 박씨, 정씨, 주씨, 홍씨 등이 본거지로 하였으나 고려조에 현치(縣治)로 하였다가 현이 없어지고 나주에 소속되었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비운의 섬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이 신안군 압해면이다.
다산이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의하면 다산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었다. 처음으로 벼슬한 선조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11世)이다. 그때부터 이어져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12世), 병조판서를 지낸 옥형(玉亨-13世),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14世),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15世), 관찰사를 지낸 호선(好善-16世), 교리를 지낸 언벽(彦璧-17世), 병조참의를 지낸 시윤(時潤-18世)이 모두 당대의 선비들이 선망하던 옥당에 들었다.
옥당은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임금의 자문에 응하던 홍문관의 별칭으로 당대에 글 잘하던 선비들이 임명되었으며 임금에게 경론(經論)을 강연하던 관직도 겸하였다. 역대 문과급 제자들의 명부인 에도 옥당에 임명된 급제자들의 이름 위에는 그 사실이 따로 표시될 정도로 옥당에 드는 것을 개인은 물론 가문의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