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에 관하여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 최초 등록일
- 2008.01.15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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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 지도자인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에 대해 알아보고
이들의 사상적 특징에 대한 리포트 입니다.
목차
Ⅰ. 서
Ⅱ. 각 인물들에 대하여
1. 수운 최제우
2. 해월 최시형
3. 의암 손병희
Ⅲ. 사상적 특징과 차이
Ⅳ. 결
본문내용
Ⅰ. 서
1860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이란 민족종교를 창도한 이래 동학의 시천주 신앙과 1905년 천도교 선포 후의 인내천 주의는 왕조사의 종말을 고하고 근대적 민족국가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우리 민족사에서 근대의 시작은 동학에서 비롯되고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거쳐 갑진개화운동, 3·1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민중의 대두였고 근대적 민족의 자각과정이었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를 비롯하여, 2대교주 해월 최시형과 3대교주 의암 손병희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들의 사상적 특징과 차이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각 인물들에 대하여
1. 수운 최제우
동학사상을 대각한 수운 최제우는 조선왕조 사회의 유교적 양반체제가 위기에 직면하고 대외적으로는 서유럽 열강의 중국침략이 시작된 문명사적 전환기의 사상가였다. 동아시아의 중화주의적 유교의 질서가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해체의 위기에 직면한 국제적 환경 속에서 조선왕조 사회도 국제적으로 서구화의 충격을 받기 시작하고 철종왕조 시기에 반발하는 농민폭동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위기에 직면한 때였다.
최제우가 양반 적자의 출신도 아니고, 상인·천인 출신도 아니고, 몰락양반 최옥의 서자로서 독서인적 교양을 쌓았으나 과거로 출세할 수는 없는 소외된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최제우는 원래 이름이 제선이었고 아명은 복술이었다. 그는 1824년 10월 18일 경주 가정리에서 학문이 높은 향반이었으나 벼슬을 못한 처사인 근암공 최옥의 ‘만득자’로 태어났다. 회갑이 지나 만득자로 얻은 복술은 아버지 최옥의 엄격한 유교 교육으로 성장하여 8세에 서당에 가서 ‘만권시서 무불통지’할 정도로 재기가 뛰어났고 10세에 “총명은 사광이요 기국이 비범하고 재기 과인하고”라 할 정도로 신동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17세에 부친이 작고하자 부친상을 입은 후 19세에 월성 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20세 때부터 생업을 찾아 헤매고 세상의 인심 풍속을 살피며 31세까지 방황하였다. 무명 장사도 해보았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주유천하하는 가운데 이 세상이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져 지금까지의 유교나 불교로서는 사회윤리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신일철, 동학사사상의 이해, 사회비평사
정혜정, 동학·천도교의 교육사상과 실천, 혜안
이영호, 동학과 농민전쟁, 혜안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편,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 지도부의 성격, 서경문화사
<참고 사이트>
네이버, 두산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