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미술작가 이인성
- 최초 등록일
- 2007.12.14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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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른 나이에 요절한 천재 화가 이인성의 생애와 그의 평가 미술계 에서의 위치,
작품 게재 및 해석
목차
없음
본문내용
1928 – 개벽사 주최 세계아동 예술전람회 수채화 특선
1929 – 제8회 선전 수채화 입선
1930 – 향토회 창립전 출품
1932 – 제11회 선전 특선
1935 – 제14회 선전 창덕궁상 수상
1937 – 제16회 선전 추천작가
1938 – 제17회 선전 심사위원
1940, 48 – 개인전
1949 –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 – 작고
이인성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 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 했다. 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2년 뒤인 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했다. 주위의 후원으로 31년 도쿄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을 하고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장은 물론 없다. 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등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 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만한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조선미전에서 데뷔한 후 8년간 `카이유`(32년 가을)`가을 어느 날`(34년)을 비롯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35년) 등 무려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 작을 내는 대기록을 세웠다.
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49년에는 제 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 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한다.
하지만 39살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죽은 이인성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에 비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인성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첫째, 그의 때 이른 죽음 때문이다. 생전에 뛰어난 기량으로 유명세를 날렸지만, 그는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의 어수선한 시절에 죽어서, 제대로 된 유작전조차 열리지 못한 것이다. 둘째, 관료적인 공모전 중심의 작품 활동 때문이다. 출세를 위해 관전만 고집했던 그의 태도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는 관전이 활동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구상화 일변도의 작품 때문이다. 그의 죽음 이후 추상화가 대세였던 국내 미술계 풍토 속에서, 지나치게 아카데믹한 구상화가 대부분인 그의 작품이 온전히 대접받을 수 없었다.
<여름 실내에서 1934>
참고 자료
한국 근대미술의 천재 화가 이인성 (신수경, 아트박스)
다시 찾은 우리화가 이인성 (황성옥, 한길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