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에 대한 찬반논쟁과 자신의 견해
- 최초 등록일
- 2007.12.12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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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화도 회군에 대한 찬반논쟁과 자신의 견해를 밝힌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논쟁에 대한 개요
2. 각각의 주장에 대한 설명
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혁명’이다?!
① 주장
② 근거
③ 포함된 가치
④ 주장자의 특성과 목적 내지 의도
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쿠데타’이다?!
① 주장
② 근거
③ 포함된 가치
3. 나의 생각
본문내용
1. 논쟁에 대한 개요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친명(親明)에서 친원(親元)으로 바뀌어, 고려·명나라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崔瑩)이 중심이 되어 명의 대(對)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③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벌할 염려가 있으며,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⑤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上書)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高峰縣:高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위화도 회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된 쿠데타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요동성을 공략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단행한 자구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계의 사불가론 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사대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사가들도 있고, 한편으로는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실리주의적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