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과 헤이그특사
- 최초 등록일
- 2007.12.08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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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상설과 헤이그 특사사건에 관한 발표문입니다.
목차
1.이상설의 생애
2. 헤이그특사사건
본문내용
이상설의 생애
이상설은 1870년(고종 7)에 충북진천에서 태어났으며, 李行雨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達城徐氏이다. 7세 때 李龍雨에게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며 유복한 환경에서 유학을 공부하게 되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근대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리범세, 려규형, 리시영, 리회영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으며, 헐버트(Hulbert, H. 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 비서감비서랑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 한성사범학교교관, 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과 함께 일본인이 요구하는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배척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를 올려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 1905년 학부협판과 법부협판을 역임하였으며, 11월초 의정부참찬에 발탁되었다. 1905년 11월 五賊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그는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였으나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조약체결이후 사임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제일먼저 그는 을사조약의 파기운동을 하였다. 그해 11월말 민영환이 자살하게 되자 종로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울며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를 하기도 한다. 다음해인 1906년에 북간도 龍井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곳에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게 된다. 이동녕 등과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반일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우게 되며, 독립운동의 방향이 自主力量의 향상과 인재의 육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민족주의교육을 보급한 것이다. 1907년 그는 李儁, 李瑋鍾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다. 이는 한국의 을사조약의 파기와 국권회복이 목적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