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의 학술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7.11.28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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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기에 앞서 - 학술과 학문
2. 한대의 상황
3. 한대의 정치사상
4. 한대의 윤리적 사회관
5. 한대의 역사철학
6. 한대의 학술 - 경학
7. 한대의 신비사상
(1) 오행설
(2) 참위설
본문내용
유술은 한 무제 때 독존의 지위를 차지하면서부터 한대 학술의 정통이 되었다. 당시의 유술은 동중서가 말한 육예와 공자의 학술을 가리키는데, 그 이후로 양한 내내 경학 연구가 활발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는 ‘경금문학‘과 ‘경고문학‘의 다툼이 있었다. 금문학은 서한 초기에 일어나서 서한에서 성행했고, 고문학은 서한 말기에 일어나서 동한에서 성행했다. 금문이라는 말은 한대에 보편적으로 통행되던 예서를 가리키고, 고문이라는 말은 무제말기에 노의 공왕이 궁실을 넓히기 위해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벽에서 나온 서적들에 나타난 올챙이 모양과 과두문(蝌蚪文)을 가리킨다. 두 학파는 문자 즉 자체가 다른 것 이외에도 경에 대한 해석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였다. 금문경학가들은 공자를 철학가이자 정치가이며 교육가로 여기고, 육경(六經)을 공자의 정치사상이 담긴 서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儀)의 발양을 중시하여 이른바 ‘통경치용(通經致用)’을 구하며, 음양재이(災異)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며 위서를 믿는다. 이에 반해 고문경학가들은 주공을 숭상하고 공자를 사학가로 여기며, 육경은 고대의 사료인데 공자가 이를 정리하여 전수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구에 대한 훈고를 중시하며, 음양과 재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위서를 믿지 않는다.
금문학은 무제가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면서 대성했는데, 오경에 설치된 14박사가 모두 금문학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금문십사박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동한의 안제 이후 금문경학은 점차 쇠락하였고. 민간에서는 고문경학이 점차 흥성하면서 대사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동한 말기에는 정현이 여러 경전에 두루 주를 달면서 이른바 ‘가법’을 타파하고 금문설과 고문설의 장점을 두루 취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이후로는 고문경학이 우세를 보여 육조의 남북학과 수당의 의소파는 모두 고문학의 입장을 취했다.
참고 자료
중국사상사 (동경대 중국척학 연구실 지음/동녘)
중국문화의 이해 (중국어문학연구회 지음/학고방)
강좌 중국철학 (북경사범대학 교수 지음/예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