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련군
- 최초 등록일
- 2007.11.27
- 최종 저작일
- 2007.10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열사강의 발표자료입니다
북한자료 도서관까지 직접 찾아가 준비한 내용입니다
목차
1. 1930년 전∙후반의 항일무장투쟁 비교
1) 1930년 초반의 항일무장투쟁
2) 1930년 후반의 항일무장투쟁
3) 보천보 전투
4) 조국광복회의 조직
5) 홍기하 전투
2. 1945년 해방이후 만주 잔류세력 (중국 정세로 본)
3. 강신태 (강건)는 누구인가?
◎ 강신태(강건)이 왜 조선으로 들어오지 않고 남았는가?
◎ 그럼 강신태(강건)은 만주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본문내용
1. 1930년 전∙후반의 항일무장투쟁 비교
1) 1930년 초반의 항일무장투쟁
만주사변 발발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 창설을 지시하고 이에 따라 만주 전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항일 유격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코민테른의 ‘일국 일당주의’ 원칙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어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이 항일 유격대 건설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구체적으로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는 “동만 각 현당 적극분자회의”가 열려, 동만에 항일 유격대와 항일 유격근거지를 만들 것이 결정되었다. 1932년 10월 이후 본격화된 유격대 결성은 연길∙왕청∙화룡∙훈춘 등지에서 연달아 이어져 총병력은 1933년 현재 360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 약 90%가 조선인이었다. 이 때 김일성은 왕청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서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33년 12월 3일 중공 만주성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왕청유격대는 1934년 3월에 편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 2군 제 1독립사에 편입되었다.북한이 오늘날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르는 군대가 바로 제1독립사였다. 아무튼 동만의 항일 유격대들은 제 1독립사로 통합∙편성됨으로써 대일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1934년 한 해 동안 900여 차례의 항일 전투를 치르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5월에는 다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
2) 1930년 후반의 항일무장투쟁
1935년 7월 25일에 개막하여 8월 20일 폐막한 코민테른 제 7차 대회는 식민지‧ 반식민지에 대해서도 반제인민전선을 제시하였는데 소수민족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미 대회 전부터 이 대회에서 제시될 新노선을 사전에 미리 알리는 문서가 나돌고 있었다. 5월 11일 길동특위는 만주성위에 대한 보고 형식의 문서에서 각지의 당과 군에게 모든 항일군을 규합하여 ‘동북항일연군’을 만들 것과 왕덕림이 만주로 돌아온다면 그를 총사령으로 삼고 양정우, 주보중을 부사령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