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세 다츠지
- 최초 등록일
- 2007.11.16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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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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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880년 미야기현 동부 이시노마키에서 출생했다. 1902년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판사·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며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조선의 의병운동을 다룬 논문〈조선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의를 표함〉을 발표하여 일본경찰의 취조를 받은 뒤부터 조선의 독립운동과 조선인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인해 체포된 최팔용·백관수 등 조선 유학생들의 변론을 맡은 뒤, 1920년에는 조선 민중의 해방운동에 노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 창간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싣는다.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치겠다.” 라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이후 1923년에 일어난 박열의 천황 암살 미수사건, 1924년에 일어난 김지섭의 일본 궁성 폭탄투척사건을 변론하는 등 일본 내 조선인과 관련된 대부분의 법률사건을 변론하였다.
1923년 관동대학살 때는 일본경찰이 ‘조선인 폭동설’ 등 유언비어의 진원이었음을 밝히면서 일본군 계엄사령부와 경찰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작성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우송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기까지 했다. 1923·1926·1927년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서는 의열 단원 김시현의 조선총독부 요인암살 기도사건, 제1·2차 조선공산당사건 등의 무료 변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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