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 최초 등록일
- 2007.11.14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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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 여는 글
◎ 을미사변의 국내적 배경
◎ 을미사변의 결정적 원인 ‘인아거일’
◎ 을미사변의 준비과정
◎ 을미사변의 진행과정
◎ 을미사변 결과와 의의
목차
◎ 여는 글
◎ 을미사변의 국내적 배경
◎ 을미사변의 결정적 원인 ‘인아거일’
◎ 을미사변의 준비과정
◎ 을미사변의 진행과정
◎ 을미사변 결과와 의의
본문내용
일본의 위축은 갑오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근왕세력과 동도서기파에게는 자주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당시 자주독립을 지킬 만한 정치세력은 친일 성향을 지닌 내각이 아니었다. 국가 주권을 지키려면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고, 왕실의 위상이 높아져야 하는 것이 역사적 조건이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황후는 삼국간섭 직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유배당한 민씨 척족을 다시 결집시켜 친위세력을 형성하고자 했다. 특히 황후의 친척 조카로서 민씨 일파의 중심인물이던 민영준을 정계에 복귀시키려 했다. 그리고 밖으로는 수원책(綏遠策)을 통해 서양 각국, 특히 러시아와 우호를 증진시킴으로써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친서방 성향을 지닌 민씨 세력의 대두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친일 세력을 사주하여 황후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사건이 미리 발각되자 그 주동자인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1895년 윤5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에 일본은 드디어 황후를 직접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들은 국내외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황후와 갈등관계에 있는 반대세력을 이 음모에 이용했다. 그래서 끌어들인 것이 바로 대원군과 훈련대 군인들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1895년 당시 대원군과 이준용은 용산강(마포)의 공덕리 별장에 유폐되어 있었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어마어마한 반역사건에 연루된 중죄인이었지만, 왕의 아버지와 조카인 관계로 고종으로서는 크게 배려한 셈인 것이다. 일본은 대원군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종 및 황후와의 불편한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대원군도 일본을 믿지 않았지만 황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대원군의 심리를 이용하여 황후를 시해하던 날 대원군을 강박(强拍)하여 궁궐에 들어가도록 유도함으로써 마치 대원군이 시해를 주도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사 9 한길사
명성황후-최후의 새벽 쓰노다 후사코 저 김은숙 편 1999 조선일보사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대러 개전 최문형 저 2001 지식산업사
새롭게 읽는 명성황후 이야기 유홍종 1999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