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 최초 등록일
- 2007.11.11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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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정의
목차
♣다산의 생애
♣다산의 사상
♣다산의 교육론
♣다산의 저작
<목민심서>
본문내용
♣다산의 생애
<출생과 가족관계>
다산 정약용은 1762년(조선 후기) 한강변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씨 집안은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적이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문과 예술의 집안이었다. 형제들은 학문적 재주가 있어 실학과 서학(천주교)에 일찍 눈을 떴으나 꽉 막힌 시대와 당쟁에 희생되고 말았다.
<성장기/청년기>
다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서 학문의 뜻을 굳게 했다.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기도 했다
<벼슬시절>
다산은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이 시작됐다. 학문과 행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얻으며 측근으로 활동했다.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수원화성의 설계,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곡산부사 임기 중 지방행정관으로서의 치적 등으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끼며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유배시절>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린다.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다.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민(民)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만년>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살았다. 자신의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훗날 인정해주길 기대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