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우파의 실력 양성론과 교육 운동론
- 최초 등록일
- 2007.11.09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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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제하 국내의 민족운동세력은 크게 민족주의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운동 세력으로 나뉘어지며, 민족주의운동 세력은 다시 민족주의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진다. 이때 민족주의 좌파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하여 비타협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대중을 동원한 반일 정치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신간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민족주의 우파는 약육강식의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 민족은 아직 독립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지 못하였다면서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앞서 실력을 양성할 것을 주장 였으며,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교육과 산업의 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과 산업의 진흥운동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민립대학기성운동, 물산장려운동이었다.
이른바 `先實力養成 後獨立`의 실력양성론이 대두한 것은 이미 한말의 계몽운동, 자강운동기부터였다. 이러한 논리는 1910년대에 들어서도 주로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지식층들에 의하여 여전히 고수되었다. 실력양성론은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민족자결주의`의 열풍에 휩쓸려 일시적으로 잠복하기도 하였으나, 3•1운동이 좌절된 이후 다시 대두하여 1920년대 초반 국내 지식층들을 사로잡았다. 즉 세계는 아직 `정의 인도`의 시대가 아니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대이며,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한국민족이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무조건적으로 독립을 부르짖는 것보다는 점진적으로 실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 다시 대두하였던 것이다. 1921년말 - 22년초 한국인들이 미국의 지원을 통한 독립이 혹시라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기대하였던 워싱턴회의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게 되자 동아일보의 한 기자는 "조선독립은 이제 당분간 절망적이므로 우리들 조선인은 힘써 교육•산업과 문화적 시설에 열중하여 실력양성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1920년대 초반 교육진흥운동은 그러한 `실력양성론` 위에서 개되었으며, 이러한 방향에서의 교육진흥론은 특히 `실업교육`을 강조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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