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답사자료집
- 최초 등록일
- 2007.10.22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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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창경궁 답사자료집
목차
창경궁의 역사
창경궁 돌아보기
<<궁궐대문을 열랍신다~! 대문과 금천>>
<<상감마마 납시오 -외전 영역>>
전하 지혜로운 정치를 하시옵소서-편전
중전마마 납시오 -내전영역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으소서-중궁전
본문내용
창경궁의 역사
동궐은 경복궁의 동쪽의 있는 창경궁과 창덕궁을 가르키는 것으로 순종황제 당시 일본인들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면서 유료 입장하는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위해 담을 쌓아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하지만 창경궁과 창덕궁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형제 궁궐이라고 할 수 있고 창덕궁이 정치적 공적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한다면 창경궁은 주로 왕실의 가족들이 기거하는 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창경궁은 수강궁을 확장 보완한 것으로 수강궁은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처소로 마련하였던 궁이었다.
창경궁은 성종 연간에 처음 지어졌으며 당시 궁궐 내에 계시던 세분의 대왕대비마마를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세조대왕의 부인이신 정희왕후, 세조대왕의 첫째 아드님이자 성종대왕의 아버지이신 의경세자의 부인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두 번째 부인이신 안순왕후 한씨 다시 말해 성종대왕의 할머니, 어머니, 작은 어머니라 할수 있다. 궁궐 안의 세 분의 웃어른을 모시기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 성종이 옛 수강궁을 확장해 지금의 창경궁을 만들게 된 것이다.
창경궁이 창건된지 100여 년 뒤인 임진년에 왜란으로 인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가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창경궁의 중건은 1615년 (광해군 7년)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바로 시작되었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자마자 창경궁의 주요 전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 해 안으로 공사를 마치도록 독촉하였다.
이 때 중건된 건물들은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인양전 및 월랑, 아문 등과 그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별당 등이었다.
광해 군 때 다시 다시 모양을 갖추었던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인조반정 직후 이괄의 난으로 명정전, 문정전, 여휘당, 취한정 외에 나머지 전각은 화재로 소실된다.
그때부터 인조는 광해군대에 지었던 경덕궁에서 9년을 살았는데 그 기간 다시 정묘호란을 만나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